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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
노사는 근세 유학의 주리파(主理派)를 대표하며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이다.
호론(湖論), 낙론(洛論)을 마감지은 독보적인 유리론(唯理論)은 한국 성리학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생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지만 장성 기씨의 후예로서 장성에서 살면서 뚜렷한 사승(師承)도 없이 평지에서 굴기(堀起)하였다. 한국 유학사의 저자인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유리(唯理)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노사는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리설(主理說)은 다른 주리파(主理派)의 학자들이 이원적으로 이(理)를 기(氣)에 대립시켜서 생각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요,훨씬 그 정도를 높여 그는 일원적으로 이(理)와 기(氣)를 대립시키지 아니하고 기(氣)를 어디까지든지 이(理)안에 포함하는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리파(主理派) 중에서 이채를 띠는 동시에 또 그 최고봉이 되는 것이며 또 그를 유리론자(唯理論者)라고 치하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에 가장 뚜렷한 세 사람의 유학자(儒學者)를 든다면 노사 선생과 더불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9)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거의 동시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학문적 성격은 서로 뚜렷하게 다르다는 사실은 흥미를 끈다.

추사는 유학자로서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한 금석학자(金石學者)로 널리 알려졌으므로 어쩌면 후기 실학자(實學者)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실증주의(實證主義)라고 일러야 한다면 혜강(惠岡)은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성리학적(性理學的) 관념론(觀念論)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처럼 전통적인 정주학(程朱學)에서 초탈(超脫)을 시도하던 시절에 굳이 이기(理氣)논쟁을 정리하여 이분원융설(理分圓融說)을 내세움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개신 유학을 내세우던 많은 실학자들이 거의 주기적(主氣的)경향을 지니었던 시절에 그의 형이상적(形而上的) 주리설(主理說)은 전통 유학의 마지막 보루로서 의미를 가졌다고 할는지 모른다.
이(理)를 기(氣)에 대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노사가 가치중립의 태도를 벗어나 선(善)의 원리 내지 선으로서의 의리를 그만큼 중요시 했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4단은 선(善) 일변(一邊)이므로 이(理)로써 말하고, 7정은 선악을 겸한 것이므로 이기(理氣)를 겸한 것이라 한다. 이기(理氣)의 글자는 선악이라는 자로 보아 무방한 것이다」 노사집구(盧沙集口) 이 주장에 의하면 이(理)는 아예 선(善)이고, 기는 악이라는 뜻인데, 그가 철저히 유리(唯理)의 철학을 견지하려 노력한 사실은 곧 그만큼 철저히 악(惡)을 피하고 선(善)내지 의리(義理)를 위하려는 의지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선 내지 의리를 실현하려는 목적의식이 그로 하여금 철저한 유리론(唯理論)의 성리학을 이룩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노사의 저서 외필(猥筆)에서는 「평범한 눈으로 보면 모든 행동이 기(氣)의 행동인 것 같으나 그 기(氣)는 이(理)의 명령을 받아서 행하는 것인즉 명(命)하는 자가 주(主)요,수명자(受命者)는 복(僕)이니 행동의 원인과 책임은 명령자인 이(理)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만사 만물의 소장(消長) 변화를 볼 때에 그것이 실로 이(理)의 사지연지(使之然之)함임을 모르고 오직 이것을 기(氣)의 작용이라 말하고, 혹 이(理)는 어느 곳에 재(在)하느냐고 물으면 다만 차(此)에 승(乘)한다고만 말하니, 이 승자(乘字)가 곧 그들로 하여금 이(理)를 경(輕)하게 알고 기(氣)를 중(重)하게 알게 한 원인이라」 지적하여 그 율곡의 학설의 잘못된 곳을 통열(痛烈)하게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가 살던 19세기는 조선조의 내외적인 급변과 충격으로 혼란이 심해가던 시기였다. 그는 내외의 현실에 결코 외면하거나 무관심 하지 않고 오히려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대응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했다.
69세 때 병인소(丙寅疏)를 통하여 당시의 시무책(時務策) 6가지를 정리하여 그의 구상을 진술하여 조정에서 채택하도록 촉구하였다.
「문인 정치에 치우쳐 국방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활도 좀먹고 화포도 쓸만한 것이 없으며, 남아있는 총도 녹이 나서 탄환 한 발도 쏠 수 없는 지경이다. 이러한 무기로써 적군을 상대한다면 한신과 백기 같은 장수가 지휘한다고 하여도 살점째 적에게 맡겨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계속 노사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왜적의 침략을 막을 방책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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