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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창의의 맹주 김경수(金景壽)
오천(鰲川) 김경수 선생은 1543년 북일면 오산리 죽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사내다운 기운이 넘쳤으며, 7세 때부터 글 공부에 힘썼다. 그 후, 하서 김인후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여 34세 때에 참봉이라는 벼슬을 받았으나, 아직 학문을 충분히 닦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그만큼 선생은 명예를 탐내지 않고 불의에 굴하지 않은 곧은 선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장성 남문(南門)에 의병청을 세우고, 아들 극후, 문하생 김언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만들어 곳곳에 보냈다.


이 때, 의병청의 맹주(盟主)에는 선생이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의병 2만여 명과 군량미 1천여 석을 모아 여러 지방으로 보내어 왜적과 싸우는 데 큰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왜적이 쳐들어 오자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고 의병과 양곡을 모집하였던 바, 각처에서 의병이 되고자 구름같이 몰려들어 4일 만에 800여 명과 700여 석이 모여졌다. 어느 날 선생은 아들 극후와 극순을 불러 놓고 "나는 이미 병들고 늙어서 싸움터에 나갈 수 없으니 한스럽구나."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들들이 "아버님! 대륜(大倫)을 내세운다면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떠나지 못할 것이며, 대의(大義)를 내세운다면 신하가 임금을 져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먼저 싸움에 나가 대의를 위해 죽을까 합니다." 라고 말하자, 선생은 기쁜 얼굴로 칭찬한 다음,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이 지키던 진주성은 엄청나게 많은 왜적의 수에 밀려 함락돼, 아들 극후와 극순은 11일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순사하고 말았다.


두 아들이 죽고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말없이 붓을 들고 썼다. "내 비록 너희들이 살아오기를 바랬으나, 할 일을 다하고 떳떳이 죽었으니 젊음이 아깝지 않도다. 외롭지 않게 순절하였으니 반드시 뜻을 같이할 사람이 있으리라." 그로부터 4년 뒤 정유재란 때에도 선생의 나이 54세였지만 종제와 함께 의병 200여 명을 모아 전주와 여산을 거쳐 경기도 안성까지 진격하면서 왜적 30여 명의 목을 베고, 많은 백성을 구해내는 전과를 올렸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조정에서는 군자감정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살다가 78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의병청의 맹주로서 의병들을 모아 각처에 지원하여 전공을 세우게 하였고, 후방에서 보급 일을 맡아 큰 공적을 세우게 된 것은, 선비로서 의리에 살았고 평소 덕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 후 선생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의 사실을 엮어 "남문 창의록(南門倡義錄)"이라 하고 창의비를 세웠으며, 모현리에 오산사를 세워 선생과 또 같이 의병 활동을 하였던 여러분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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