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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지방에서 구석기유적은 북이면 달성리 밀등과 북이면 사가리 조산마을·북하면 중평리 강선마을에서 유문암제 석기가 출토된 바 있다. 관내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적인 고인돌은 245기가 분포된 것으로 조사되었다.(장성읍 41, 삼서면 20, 삼계면 60, 서삼면 7, 북이면 38, 북하면 55, 남면 7, 진원면 3, 북일면 9, 황룡면 5)〈장성군 문화유적〉그리고 북이면의 조개더미(貝塚)·세형 동검, 장성읍 영천리 구산 마을에서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완형토기·붉은 간토기(紅陶)·돌촉·동창, 동화면 구림리에서 돌도끼·돌끌, 서삼면 용흥리 태암마을에서 이형반달돌칼(異形半月形石刀), 남면 행정리에서 돌도끼, 삼서면 석마리에서 돌도끼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됨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부터 이미 농경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3세기말 중국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마한시대의 문화상을 [벼를 심어 곡식으로 하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고 하였다. 이는 곧 토착 농경시대가 형성된지 이미 오래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장성은 누에의 전설과 같이 황룡강 주변과 산간 지방에 집단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을 리 없다고 본다.

삼한시대에 이 지역은 마한에 속한 곳으로 마한에는 54개 부족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정인보, 신채호, 이병도는 지금의 진원면, 남면, 장성읍 남부와 황룡면 동부 지방에 구사오단국(舊斯烏旦國)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하고, 천관우는 지금의 북일면 북이면, 북하면, 서삼면, 장성읍 북부 지역이 장성의 옛 이름이 고시이(古尸伊­골이)로써 고랍국(古臘國)에 비정하고 있다. 유창균은 지금의 삼서면, 삼계면, 동화면, 황룡 서부 일대에 임소반국(臨素半國)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한 바 있다. 이 시기의 출토 유물로는 장성읍 청룡마을 뒷산의 돌무덤에서 유개합(有蓋盒) 2쌍, 동화면 서양리에서 토기류 6점, 북이면 백암리와 죽청리에서 출토된 삼족토기(三足土器), 남면 마령리 시정마을 앞에서 문살무늬(格子紋)·삿무늬(繩蓆紋)·회색경질토기편·굽다리접시(高杯)조각 2점 등이 수습되고 있다. 이 밖에 고분은 남면 5기, 삼서면 6기, 진원면 2기, 삼계면 1기, 황룡면 1기, 장성읍 2기가 조사되었다.

장성읍지 영광읍지 건치연혁을 보면 백제시대에 장성을 고시이현(古尸伊縣)·진원현은 구사진혜현(舊斯珍兮縣)·삼계현 즉 소비혜현(所非兮縣)­일명 소을부리(一名 所乙夫里)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비단 읍지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 여러 책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장성군은 3개현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행정구역의 연원은 한사군(漢四郡)의 제도에서 시작하여 부여의 5부제와 삼한의 군현제는 소봉건 부족사회가 점차 발전하여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됨에 따라 군·현의 지방 제도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군현제도의 연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백제에서는 5부(部) 5방(方)제를 채택하였다. 행정구역은 도내(都內)에는 5부제를, 지방에는 5방제를 택하여 도내 5부는 상부(동부), 하부(서부), 전부(남부), 후부(북부), 중부를 두었다. 백제의 지방의 5방은 중방(古沙城), 동방(得安城), 남방(久知下城), 서방(刀先城), 북방(熊津城)이었으며, 이들 방 밑에 군·현이 있었다. 따라서 장성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남방 밑에 고시이현과 구사진혜현, 소비혜현의 3개 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확대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행정구역을 재편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677년(문무왕 17)부터 697년(신문왕 7)까지 연구 채택된 것이 9주(州) 5소경(小京)제이다. 9주를 설치한 것은 3국의 옛 땅을 균배를 고려하여 신라 본토와 백제, 고구려 옛 땅에 3주씩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5방의 수에 대응한 것으로 정복된 백제, 고구려의 귀족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특별 행정구역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국에 9주 5소경 117군 293현으로 확정되었다. 이때 장성은 고시이현에서 군으로 승격되어 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은 진원현(珍原縣)으로, 소비혜현이 삼계현(森溪縣)으로 이름이 전부 바뀌었다. 따라서 9주의 관할인 무진주(武珍州)의 관할인 갑성군이 되고 속현으로 진원현과 삼계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향(鄕)·소(所)·부곡(部曲)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하급 행정구획이다. 진원현에 예속되어 있던 마량향(馬良鄕­古名은 長良鄕­모랭이)은 지금의 장성읍 대창동 충무동 일대로 어느 시기부터 언제까지 존치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 고속향(古屬鄕)으로 되어 있어 이 이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후대의 기록은 부곡으로 표기되고 있어 향인지 부곡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곳의 토성은 신(申)씨이다.

892년(진성왕 6)에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견훤이 광주에서 기병하여 후백제란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장성은 936년(고려 태조 19)까지 후백제의 치하에 있었다.

940년(태조 23)에 갑성군을 장성군(長城郡)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장성이 된 것이다. 991년(성종 10)에 전국 주(州)·군(郡)의 별호를 정하였는데, 이때 장성은 이성(伊城)으로, 진원은 구진(舊珍)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군명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별호인 것이지 군명이 바꿘 것이 아니다.

1018년(현종 9)에 지방 제도가 확립되어 5도 양계제 실시에 따라 이 때에 장성은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는 영광이 고려 건국에 공이 있는 고을이기 때문에 장성군의 속현인 삼계현도 영광군의 속현이 되고, 진원현은 나주목의 속현으로 소속을 바꾸었다. 군(郡)·현(縣)에는 영군현(領郡縣)과 속군현(屬郡縣)의 구별이 있었던 바 영군현은 지방 장관을 임명한 군·현이고, 속군현은 그것을 임명하지 아니한 군·현이었다. 속군현은 영군현에 예속되거나 경(京)·도호부·목(牧)에 직속되어 운영되었다.

1172년(명종 2)에 현령을 둘 수 없는 53개 작은 현에 감무를 두었는데, 이 때 장성과 진원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영광과 나주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삼계현은 독립되지 못하고 영광군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 감무관(종 6품)은 조선 초기까지 존속되었고, 후에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왕조로 들어와서는 대체로 고려의 편제를 답습하여 1413년(태종 13)에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각도에 관찰사를 두고 부윤(府尹),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목사(牧使), 도호부사(都護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의 순차로 각 고을에 수령을 두었다. 전라도는 전주에 관찰사를, 장성은 나주목의 관할이 되고, 진원은 장흥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장성과 진원에 감무를 현감으로 바꾸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장성현의 호수가 183호, 인구는 840명이고, 진원현은 144호에 747명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격은 후 장성과 진원 두 현이 매우 핍폐하여 자립할 수 없으므로 양현의 부노(父老)들이 통합할 것을 청하여 1600년(선조 33)에 장성현이라 하고 장성현의 소재지인 지금의 북일면 오산리에서 남쪽으로 20리, 진원현의 소재지인 지금의 진원면 진원리에서 북쪽으로 20리 지점인 옛 장성의 터 영천리로 치소를 옮겼다.

군이 도호부로 승격한다던가, 반대로 군이 현으로 강등하는 것은 인구나 민호, 그리고 지역의 확장이나 도시의 형성 등에 의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지역에 공신이나 효자가 나왔다던가 반대로 그 지역에서 역신이나 난을 일으킨 자가 나왔을 경우에 그 지역에 대한 상벌로 격이 승강하는 이른바 승강지법(昇降之法)에 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1655년(효종 6)에 군비 확장에 따라 입암산성을 정비하고, 장성현을 도호부로 승격, 장성도호부사가 입암산성 수진관(守鎭官)을 겸임토록 하였다. 이때 치소를 성자산 아래 성산리로 옮겼다.

조선중기 이후부터 지방행정의 말단 행정구역으로써 면·동·리·5가통의 기록이 보인다. 면과 동·리는 부·군·현의 장(수령)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만 주민이 피치자로서의 의무와 기능을 다하기 위하여 구성한 관습상의 행정 단위였다. 대체로 한 군·현이 20∼30개 면으로 구분되었다. 동·리는 동·리 외에 포·평·촌·곡·치등 명칭이 다양하고, 그 구역과 경계가 불분명하였으나, 대체로 5∼10개동·리가 모여 한 면을 이루었다.

1759년(영조 35)에 발행한 여지도서에 따르면 15개 면이 처음으로 보이며, 호구 수는 6,242호에 12,823인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20년후인 1789년(정조 13)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15개 면 289리에서 6,709호에 22,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은 왕조상으로 보면 한일합방 연도인 1910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조선왕조는 갑오경장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종래의 중국식 가산국가 체제가 서구식 근대국가 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이 시대에 마련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1895년(고종 32)에 칙령 제98호에 의거 지방제도의 대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로써 1413년 이래 480여년간 습용되어 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채택되었으며, 종래의 부·목·군·현등 다양하게 불리던 하부 지방행정구역들이 군으로 통칭되었다. 이때 장성도 군으로 되어 군수를 두었다. 또한 칙령 제101호에 의하여 내무아문(內務衙門)을 지방행정의 주무부로 하고, 내무대신­도관찰사­군수간의 지휘감독 계서제(階序制)가 채택되어 지방행정의 근대화 과정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23부제는 간편하고 상당히 합리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나, 종래의 뿌리 깊은 8도제를 무시한 획정이었기 때문에 오랜 전통과 현실 사이에 마찰이 일어, 그 실시 1년 3개월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1896년(건양 1)에 칙령 제36호로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채택하였다. 이 때의 13도는 종래의 8도에 바탕을 두어 경기, 강원, 황해의 3개 도를 제외한 충청, 경상, 전라, 함경, 평안의 5개 도를 남북 양도로 분할한 것이었다. 수도인 한성부는 행정직할지로서 도와 격을 같이하였다. 이때부터 장성은 전라남도의 관할인 3등군이 되었다.

1906년(광무 10)에 창평군의 갑향면(甲鄕面)(지금의 대전면 일부)이 장성군에 편입되어 16개면이 되었다. 그리하여 1910년 한·일 합방까지 부, 군, 면 등에 대한 부분적인 개편이 이루어져 한일합방 직후 행정구역을 보면 13도, 12부, 317군, 4,322면이었다.

1910년(융희 4)에 칙령 제354호인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에 의거 지금까지 면은 하나의 관례상의 구역이요 법적 단위가 아니었는데 면의 지위가 명문으로 제도화되어 면장을 두되 면장은 군수의 지휘 감독을 받아 면내의 행정사무를 보조 집행하도록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면과 동·리의 명칭과 관할구역의 대대적인 개편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광군의 일부인 삼북(森北), 내동(內東), 현내면(縣內面)을 합하여 삼계면(森溪面)으로, 삼남(森南), 외서(外西)면을 합하여 삼서(森西)면으로, 외동(外東)면과 함평군의 대화(大化)면을 합하여 동화(東化)면으로 바꿔 모두 장성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관내 면중에 남일(南一), 남이(南二)면을 합하여 남면(南面)으로, 내동(內東), 외동(外東), 남일(南一)면의 일부를 합하여 진원(珍原)면으로 남삼(南三), 서일(西一), 서이(西二)면을 합하여 황룡(黃龍)면으로, 읍서(邑西), 읍동(邑東)면을 합하여 장성(長城)면으로, 역면(驛面)을 북삼(北三)면으로 개칭하고, 갑향면을 담양군에 다시 넘겨줌으로, 장성군은 13개 면 123리가 되었다.〈1913. 12. 29. 부령 제111호〉

1915년에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생촌 마을을 삼계면 생촌리에 편입되고, 1921년 군청소재지를 장성읍 성산리(구읍)에서 현재의 영천리로 옮기었다. 1930년에 북삼면(지금의 장성읍 부흥·백계·용강·봉덕·덕진·상오·야은리)을 장성면에 합병하고, 북일면 공평마을을 서삼면 송현리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장성은 12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36년에 장성면이 읍으로 승격이 되어 1읍 11면이 되었다. 1943년 10월 3일 읍소재지를 현재의 읍사무소로 옮겼다.

1945년 해방으로 군정법령 제22호로 38선 이남에 연접한 행정구역을 조정하고,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부분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으나 장성은 변동이 없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23일부터 10월 22일까지 공산치하에 있었다.

1975년에 장성댐의 편입지역인 북상면이 폐지되면서 용곡리는 장성읍에, 수성·오월·조양리는 북이면에, 신성·쌍웅·동현·덕재리를 북하면에 편입, 1읍 10면이 되었다. 1983년 남면 삼태리 지촌의 일부를 광주시 오룡동에 편입되었다.

2000년 12월 현재 장성군은 1읍 10면 123법정리와 280개 행정동·리, 467개 자연마을, 526개 반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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