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의 자연 친화 도시 옐로우시티 장성

꿈과 희망이 있는 옐로우시티 장성

제1장 언론과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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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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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한국신문의 발족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1883년 [한성순보]의 창간으로부터 시작하며, 민간지인 [독립신문], [뎨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으로 이어지는 1883년부터 1910년까지의 신문을 흔히 '근대신문'이라 말한다. 이 같은 근대신문이 갖는 여러 특성들은 시대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신문의 성격적 원형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우선주의의 정론지적 성향, 국민을 계도하고 지도하려는 엘리트주의, 야당적 투쟁성향은 정치권력과의 갈등을 초래하는 원형이기도 하지만, 국가우선주의의 전통은 정치권력의 언론통제를 당연시하는 순응주의의 뿌리일 수도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은 1909년 10월 15일 경남 진주에서 발행된 [경남일보]가 효시이다. 이 신문은 당시 중앙지들처럼 심한 경영난을 겪으며 휴간을 반복하다 한일 합방직후 일제의 탄압 속에 1914년 폐간하고 말았다. 경남일보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우리 손으로 발간한 지역신문은 단 하나도 없는 지역신문의 암흑기를 보내야 하였다. 특히, 전남지역의 경우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민족신문들의 혜택으로 부터도 소외된 지역이었다.

구한말과 일제치하를 통틀어 광주·전남을 포함한 호남지역에서는 조선인에 의한 신문은 없었으나 일본인들에 의한 일어판 신문은 여러 지역에서 발행되고 있었다. 전남 목포에서는 [목포신문], 광주에서는 [광주일보] 등이 현지의 일본인에 의해 발행되고 있었다. 전남 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인신문이 나온 목포에서는 [목포신문] 이외의 신문들이 경영난으로 곧 폐간되었으며, [목포신보]가 목포의 유일한 신문으로 1941년 2월 10일까지 발행되었다. [광주일보]는 1909년 일본인에 의해 광주에서 주간으로 창간되었는데, 창간 당시에는 [광주신보]란 제호로 출발했으나, 중간에 [광주일보]로 개제(改題)된 듯하며, 1941년 일본 총독부의 '1도 1사주의' 언론정책으로 [목포신보]와 통폐합되어 [전남신보]로 발족되었다. 1920년이 될 때까지 조선에는 총독부 기관지와 일본인이나 친일계 인사가 경영하는 신문만이 발행되었으며, 조선인에 의한 합법적인 민간지는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무신문(無新聞)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 후 전남지역에 제일 먼저 등장한 근대적 지역신문은 과거 일본인들의 신문이었던 [전남신보]의 제호를 그대로 답습한 [전남신보]이다. 그러나 1946년 3월 21일 [전남신보]라는 명칭이 일제의 잔재이고, 지역성을 강하게 담고 있다는 이유로 [호남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광주민보]는 [동광신문]의 전신으로 광주에서는 [전남신보]에 이어 1945년 10월 10일 창간되었는데, 이 신문은 민보라는 제호가 좌경이라 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동광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한 후에도 좌익지라는 이유로 무기정간을 당하다가 결국, 6·25사변의 발발과 함께 완전히 그 명맥이 끝났다. [조선중보(朝鮮衆報)]는 1946년 3월에 창간되었으나 운영진들의 불화로 분란이 일었으며, 1947년 7월 [광주신보(光州新報)]로 제호를 변경하고 재기를 시도, 지속적인 자본투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경영권이 바뀌는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1960년까지 존속되었다. 해방 이후 광주를 제외한 전남지역에서 근대적 형태의 신문이 등장한 것은 목포와 여수이다. 목포에서는 1945년 10월 19일자로 일제 말 '1도 1사주의'에 따라 [전남신보]로 통폐합되었던 목포의 일문판 [목포신보]의 속간호가 나온 것이 지역신문의 효시이다. [목포신보]는 1946년 8월 1일자로 [목포일보]로 바꾸어 발행되었고, [목포일보]는 1952년 12월 주식회사 체제로 탈바꿈하면서 점차 지역신문으로서의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1965년 [호남매일]로 개제(改題)하여 1973년까지 발행되었다. 이 시기에 목포에서 발행된 또 다른 신문으로 [전남민보]가 있는데, 1946년 창간 당시에는 [목포신문]으로 출발했으나 곧바로 [전남민보]로 개제했으며, 좌익계 신문으로 지목되어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무기정간 처분되자 자진 폐간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여수에서도 1945년 9월 10일부터 [해방시보]라는 최초의 지역신문이 등장했는데 등사판 전단 수준에 머무른 채 소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수의 본격적인 지역신문은 1945년 10월 20일경 발간된 [대중보(大衆報)]이다. [대중보]는 주식회사 체제로 발족한지 5개월 만인 1948년부터 제호를 [여수일보]로 바꾸고, 광주를 비롯한 전남 동부 6개 군에 지국을 둘 정도로 사세를 신장하였다. 그러나 [여수일보]역시 여·순사건으로 사옥이 불타는 등 경영상의 곤란을 겪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에 접어들자 그때까지 남아있던 서울의 [제일신문], [조선중앙일보], [세계일보]가 정간처분을 당하는 등 남아있던 반체제 신문들이 강경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전남의 지역신문은 광주에서 [전남신보]의 후신인 [호남신문], [조선중보]의 후신인 [광주신보], [광주민보]의 후신인 [동광신문], 그리고 전남에서는 [목포일보]와 [여수일보]로 대표된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동광신문]은 자동소멸되고, 전라남도의 기관지로서 [전남일보]가 창간되었다. 결국 광주의 [호남신문], [광주신보], [전남일보]와 전남의 [목포일보], [여수일보]는 1950년대 중반까지 광주·전남 지역신문의 중추가 되었다.

4·19혁명으로 시작된 제2공화국하의 언론은 언론사상 가장 자유를 구가한 시대였다. 일간신문의 경우만 해도 이전에는 41개에 불과했던 것이 112개로 늘어나는 등 봇물 터지듯 정기간행물의 발간이 불어났다. 이에 따라 광주·전남지역에서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상당히 많은 신문매체가 탄생했는데, 4·19직후인 1960년 9월 [전남매일신문], 11월에는 [남도일보]가 창간되었다. [전남매일신문]은 [농촌중보(農村衆保)]를 모체로 한 신문으로 1980년 통폐합때까지 [전남일보]와 함께 광주의 대표적 양대 신문으로 자리 잡았다. 목포에서는 1960년 7월 [목포매일신문], 여수에서는 1961년 3월 [여수신보]가 주간으로 창간되었다. 또한 순천에서는 [순천일보], [순천매일신문], [서남신문] 등이 창간되었고, 그밖에도 [순천통신], [전남통신], [삼남통신] 등 일간통신이 창간되었다. 특히, 광주에 새로 창간된 [전남매일신문]은 당시 내분과 경영난으로 허덕이던 [호남신문]과 [광주신보]의 중견인력을 상당부분 흡수함으로써 양 신문의 존립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고, 이후 [광주신보]는 자연 소멸되고 말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시작과 함께 광주·전남의 지역신문의 구도도 크게 바뀌었다. 1961년 5월 23일 시설미비를 이유로 전국에 걸쳐 1,200여 개의 정기간행물이 폐간되었는데 전남에서도 [광주신보], [남도일보], [여수일보], [목포매일신문], [장흥신보], [순천일보], [전남통신], [순천매일신문], [순천통신] 등이 폐간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광주의 [호남신문],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 그리고 목포의 [목포일보]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여기에 해방이래 광주 지역의 대표적 언론으로 군림해 왔던 [호남신문]은 귀속재산으로 이듬해인 1962년 8월 30일 지령 4,783호를 끝으로 종간하고 경매처분을 통해 그 시설을 [전남일보]로 넘겨주었다. 결국 광주에는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 2개 지만이 남게 되어 두 신문의 독주시대가 시작되었다.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기업화 정책에 따라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광주를 제외한 전남 유일의 일간지인 [목포일보] 역시 기업으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고, 1965년에는 신문의 광역권 표방을 명분으로 신문의 제호를 [호남매일신문]으로 바꾸고, 지역문화 및 봉사사업을 적극 추진하면서 지역민의 호응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잦은 경영난과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호남매일신문]은 1973년 5월 31일자 지령 1만 2777호를 마지막으로 자진폐간 형식을 빌어 종간하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은 신문기업에 대한 지원을 통해 발행인을 그 영향권 하에 두었으며, 신문내용은 정치적 논의와 같은 뉴스위주의 신문에서 교양, 오락면을 넓히는 신문으로 편집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의 언론통제'라고 통칭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이 시기의 언론통제 양식은 흔히 '순치(馴致)'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전 시대의 통제양식과 질적으로 다르게 전개되었다. 즉, '형식도 없고 불가시적이며 법제에도 나타나지 않는 고도화되고 은밀한 언론통제의 기술'에 의해 언론 스스로가 정치권력에 대해 자진협조와 동반자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79년 10·26이후 광주에서도 모든 보도· 출판매체는 전남도청 2층에 있던 검열관실에서 검열을 받아야만 하였다. 당시 광주에서 발행되고 있던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은 이 같은 검열로 행간이 공백상태로 남아있거나 돌출광고가 들어있는 있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공화국의 언론통제 시나리오는 1980년 5월 17일 계엄검열을 거부한 기자협회 간부체포, 구속으로 시작해서 언론인 강제해직-언론통폐합-언론기본법 제정-문공부 홍보조정실 설치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지방의 한 도에는 하나의 신문사만을 둔다는 이른바 '1도 1사 원칙'은 전남에도 예외 없이 통폐합을 강요하였다. 당시 전남에서는 11월 29일자로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을 주식회사 형태로 통합하고 12월 1일부터 [광주일보]라는 새로운 이름의 신문이 탄생하였다. [전남일보]는 28년 9개월, [전남매일신문]은 20년 5개월만에 우리 지역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광주일보]는 12월 1일자 창간호에 게재한 창간사에서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의 통합을 '지난 11월 14일 한국신문협회가 채택한 언론구조의 자율적 개편결의에 의한 것'이라 밝히고 그 조치가 '새시대 창조의 문턱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언론 스스로의 혁신이라 자부한다'고 하였다. [광주일보]는 지역신문을 독점한 만큼 경영면에서 상당한 성장을 도모한 시기였으며, 1984년 10월에는 월간 [예향]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제6공화국시대는 언론통치의 상징이었던 '언론기본법'이 폐지됨에 따라 신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확보된 시기였으며, [정기간행물 등록법]을 제정함으로써 각 지방별로는 새로운 신문들이 창간을 서둘렀다. 광주에서도 [전남일보]가 1987년 10월 10일 창립총회를 거쳐 1989년 1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에 이어 [무등일보]가 1988년 2월 12일 창립총회를 거쳐 [전남일보]보다도 빨리 1988년 10월 10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뒤이어 [전남매일신문]도 1989년 6월 29일 창간되었다. 이때 새로 탄생한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은 1980년 [광주일보]로 강제 통합된 사라진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새 신문이다. 그런데도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라는 제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창간 무렵 옛 [전남일보], 옛 [전남매일신문] 관계자들의 저항을 받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광주매일신문]은 1991년 1월 29일 회사를 설립하고, 같은 해 11월 1일 창간호를 발행했으며, [광남일보]를 전신으로 하고 있는 [호남신문]은 [광남일보]라는 제호로 1995년 5월 6일 법인 등기를 마치고, 같은 해 12월 12일 창간호를 발행했으며, 1998년 11월 11일 [호남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광주타임즈]는 1997년 9월 20일 법인을 설립하고, 1998년 5월 10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또한, [호남매일]은 2000년 8월 21일 설립 법인 등기를 마치고, 같은 11월 25일 창간호를 발행했으며, [호남일보]는 2000년 11월 29일에 회사를 설립하고, 2001년 1월 5일에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신문의 창간이 신고제를 유지하고 있는 2001년 현재, 광주에는 기존 [광주일보] 외에, [전남일보], [무등일보], [전남매일], [광주매일], [호남신문], [광주타임즈]를 비롯해 기자협회에 정식 등록되지 않은 [호남매일], [호남일보]까지 총 10여 개에 달하고 있다.장성지역의 향토신문은 1994년 8월 22일에 창간된 [장성신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등록취소 및 자진폐간하였다. 현재는 월간발행의 장성닷컴이 2001년 9월 18일 창간되었다.

2.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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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방송은 1920년대 일제의 소위 '문화주의 통치'의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1927년 2월 16일, 호출부호 JODK, 주파수 690KHz, 출력 1kw로 정규방송을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초기부터 사전검열과 감청제도, 차단기 설치 등으로 총독부 체신국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1935년 7월 경성방송국은, 경성방송국을 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한 뒤, 부산방송국(제1방송, 250w)을 시작으로 지방 방송망을 확충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이듬해인 1936년 4월 평양방송국(50w)이 설치되었는데, 지방방송국으로서는 최초의 이중방송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같이 이른바 전조선 방송망 구성계획에 따라 청진(1937년 6월 5일, 제1방송, 10kw), 함흥(1938년 10월 1일, 제1방송, 500w) 순서로 5개 국을 개국함으로써 제1기 전국 방송망 계획이 완성되었다. 일제의 조선방송협회는 제1기 지방 방송망이 완료되자 곧이어 소위 제2기 지방 방송망 구성계획에 착수하였다. 1939년 10월부터 임시방송을 해온 대구방송국에 이중방송 장치를 시공하여 1941년 4월 1일부터 방송을 개시하는 한편, 1942년 3월 21일에는 이중방송인 광주방송국을 개국함으로써 이 지역에도 드디어 방송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JBHK 광주방송국은 1942년 3월 21일 오후 1시 그 첫 방송을 개시하였다. 경성 중앙방송국이 개국한지 15년만이었다. 당시 광주방송국은 제1방송과 제2방송의 전파를 동시에 발사함으로써 우리 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이중방송을 동시에 시작한 첫 방송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방송협회는 1945년 1월 23일 광주방송국 목포방송소를 개소한지 약 2년 2개월만에 방송국으로 격상시켰다. 목포방송국은 1941년 9월 1일 조선방송협회 광주출장소 목포 라디오 상담소로 출발한 이래, 1942년 3월 21일에는 광주방송국 목포출장소로, 같은 해 11월 1일 목포방송소로 격상되는 과정을 밟아왔었다. 이때부터 목포방송국은 제1방송만 실시했고, 호출부호 JBLK, 주파수는 1,280kw, 출력은 50w였다. 그러나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이 방송됨으로써 경성 중앙방송국(JODK)와 함께, 이 지역의 JBHK 광주방송, JBLK 목포방송도 종료를 고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하의 방송시대가 막을 내렸으나 일제의 공백을 곧바로 미국이 메웠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하에 있던 우리 나라는 국제무선위원회 회의를 통해 1947년 9월 3일 'HL' 호출부호를 할당받았다. 이때 배정 받은 광주방송국의 새로운 호출부호는 HLKH, 목포는 HLKN이었다. 1948년 2월 14일 광주방송국은 출력을 50w에서 500w로 증강함으로써 1급 방송국으로 격상하기에 이른다.

6·25가 나자 방송국을 국방부가 장악하여 광주방송국도 광주 주둔군 사령부의 관장하에 있게 되었다. 군당국은 가끔 전황을 제공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대전·대구로 이동한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수신중계 하였다. 9·28수복 후 지방국 복구지원단의 도움으로 정규방송을 재개한 광주방송국은 1956년 7월 1일 송신기의 전력 증폭부를 개조하여 출력을 증강했고, 1960년대 초에는 하루 3시간 30분을 자체 프로그램으로 충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기에 접어들어 우리 나라는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방송(HLKY)이 개국함으로써 일제의 JODK에서 KBS에 이르기까지 27년 동안 지속되어 온 관영방송체제가 무너지고 관, 민영방송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서 1960년까지는 기독교 방송의 출현 외에 한국복음주의 방송국(뒤에 극동방송),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인 HLKZ-TV가 등장하여 사영방송이 급속히 등장한 시기이다. 그리고 부산문화방송이 개국하여 본격적인 지역매체의 활성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 목포방송국은 방송선을 이용하여 도서 지방과 작전 지역의 해안에 20회 이상 방송을 실시하였다. 특히, 9월 13일의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하는 등 대한민국 방송사상 최초의 해상방송을 실시하는 기록을 세웠다.

5·16쿠데타 직후까지 KBS의 지방방송국은 15개 국에 달하였다. KBS 광주방송국은 1961년 4월 15일 신촌리 송신소에 10kw송신 시설의 설치공사가 준공되어 출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주파수도 760KHz에서 680KHz로 변경하여 이 해 8월 1일을 기해 정식 개소 방송하다가, 1962년 6월 15일 주파수를 660KHz로 다시 변경하였다. 이 시기에 서울지역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다. 1961년 12월 24일 국영 텔레비전은 시험전파를 발사하는데 성공하였고, 12월 31일에는 영상출력 2kw, 음향출력 1kw, 주사선 525, 호출부호 HLCK, 채널 9로 정식 개국하였다. 광주의 무등산 TV중계소는 1966년 8월 15일 광복 21돌을 맞아 방영을 시작하였다. 이는 HLKZ-TV가 탄생한지 10년, KBS-TV가 탄생한지 5년만의 일이었다. 이해 8월 29일 광주에 새 상업방송인 호남 텔레비전 방송주식회사(뒤에 광주문화방송 주식회사, R TV)가 탄생하여 출력 5kw, 채널 9로 방송을 시작함으로써 광주에서 국·민영의 두 텔레비전국이 공존하게 되었다. 한편, 1971년 4월 24일 또 하나의 상업방송인 VOC 전일방송이 광주에 출현함으로써 KBS, CBS, MBC, VOC 4개 라디오 방송국 사이의 청취자 확보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 졌다. 그러나 VOC 전일방송은 신군부에 의한 소위 언론통폐합 조치로 무선국 허가와 주파수, 방송기자재 일체를 KBS에 넘기고 1980년 12월 1일에 문을 닫힌 단명의 이 지역의 민영상업방송이 되고 만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방송은 몇 가지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첫째는 1971년 MBC가 경영합리화를 위해서 직할국들을 매도, 종래 MBC 방송망에 속해 있던 모든 방송국을 '문화방송'이라는 호칭으로 통일, 가맹관계를 밀접화하면서 경향신문을 흡수, 합병하여 종합 언론기업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1973년 유신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방송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로서 '방송법'을 개정했으며, 셋째, 이와 같은 맥락에서 KBS가 '한국방송공사'로 개편되었다는 점이다. 한국방송공사 발족 후 광주방송국은 TV 난시청 지역해소를 위해 무인 TV 중계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1974년 11월 20에는 광주·목포·여수·순천 중계소간의 FM망이 구성되어 광주국 관할 을지국(乙地局)과의 방송상태가 개선되었으며, 1975년 10월 30일 영광중계소가 개소되었다. 이어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순천중계소를 개소하여 방송을 시작하였다. 순천중계소는 1976년 11월 26일 방송국으로 승격하였다.

기독교광주방송(HLCN)이 개국한 것은 서울, 대구, 부산에 이어 4번째로 1961년 8월 1일 이었다. 뒤이어 1964년 6월 13일 광주문화방송이 방송을 개시함으로써 지역민방의 경쟁이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기독교광주방송에서는 민간방송으로서 선교방송이라는 일면과 상업방송이 지니는 면을 살리기 위해 선교성의 로컬프로를 확충하는데 주력하였다.

1961년 첫 상업방송 '한국문화방송'이 서울에서 정규방송을 개시한 지 약 2년 후인 1963년 4월 12일 대구, 광주, 대전, 전주에 지방국 설치허가를 얻어 개국준비를 서둘렀다. 이 해 8월 8일 대구국이 개국한데 이어 다음해 1964년 5월 24일부터 시험방송을 거쳐 6월 13일 출범한 광주문화방송은 이 고장에서는 첫 상업방송이었다. 민영상업방송인 MBC 광주문화방송의 개국으로 이 지역에서 방송의 독점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3년 전인 1961년 민영방송 CBS 광주기독교방송국이 개국했지만 설립 목적이 복음전도라는 특수방송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방송제도상 하나의 전기를 가져온 계기는 되었지만 완전한 국·민영방송이 공존하는 체제는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1969년 10월 23일 무등산 TV중계소 건물을 기소, 1970년 6월 19일 준공하고, 8월 15일을 기해 시험전파를 발사했으며, 8월 29일 첫 전파를 발사함으로써 이 지역에도 민영상업 TV시대의 막이 올랐다.

목포문화방송국은 1968년 3월 23일 주식회사 라디오목포(RMB)가 설립되면서 시작하였다. 7월 30일에는 AM 용해송신소를 완공하고, 곧이어 한국문화방송과 프로그램 제휴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고 8월14일에는 무선국 허가를 받아 8월 17일에 개국하였다. 1971년 '목포문화방송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였고, 1975년에는 방송국 식별부호를 MBC로 지정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수문화방송은 '남해방송주식회사'로 1970년 7월 24일에 설립등기를 마치고, 7월 30일 송신소를 준공하면서 시발하였다. 1971년 8월 31일 시험전파의 발사에 성공하고 8월 27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1971년 10월 1일에는 '여수문화방송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1980년 5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실상부한 국가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강압적인 언론 통폐합, 언론기본법의 제정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한국의 방송은 공영 KBS와 민영 MBC로 크게 이원화되었다. 방송사의 통폐합으로 인해 KBS는 궁극적으로 기존 채널 외에도 인수 방송사의 채널을 그대로 살려 TV 2개 채널, 라디오 4개 채널을 가진 종합방송으로 거대화되었으며, KBS 광주방송국은 통폐합으로 AM 2개 채널과 FM 3개 채널 등 5개 채널로 늘어나 채널간의 특성정립에 고심해야 하였다. 한편, 유일한 사영 민간방송으로 남게 된 MBC는 본격적인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했으며, 광주 MBC는 텔레비전 방송을 출력을 5kw에서 10kw로 증강하고 기구를 개편하였다. 1983년 10월 22일 광주MBC는 세 번째의 전파매체로서 출력 5kw, 주파수 91.5MHZ, 호출부호 HLCN-FM을 개국하여 이른바 '전파매체 삼위일체'의 조직을 갖추었다. 또한 난시청지역 해소를 위한 방송망 확장사업에 주력하였다.

1986년 5월부터 CBS 뉴스와 광고방송 부활운동이 광주와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CBS 광주국은 뉴스 폐지와 광고방송 중단이라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방송기능 회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방송기능 회복을 위한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1987년 10월 19일을 기해 CBS 뉴스를 부활하고 동시에 보도부도 부활하였다.

KBS, MBC, CBS 광주방송국 외, 2001년 현재 광주 지역방송국을 살펴보면, KBC 광주방송과 광주케이블 TV, 그리고 라디오 방송인 BBS(불교방송), PBC(평화방송), TBN(교통방송) 광주국이 있다.KBC 광주방송은 1994년 8월에 공보처에 의해 지역 민방사업자로 선정되고 9월 30일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출발하였다. 이어 12월 20일에는 정보통신부로부터 방송국 허가를 취득하였고, 1995년 4월 1일부터 시험전파를 발사하다가 5월 14일에 채널 37, 호출부호 HLDH-TV, 출력 30kw로 TV 방송국을 개국하였으며, 뒤이어 1998년 2월 2일에는 FM 방송국(FM 101.1 MH)을 개국하였다. 또한 1998년 7월 2일에는 목포, 해남중개소를 개국하였으며, 1999년 12월 15일에는 동부권 중개소(여수, 광양, 순천, 진도)를 개국하였다.

한편, 1995년 케이블 TV 도입과 함께 광주는 동구·북구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광주케이블 텔레비전과 서구·남구·광산구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광주케이블 TV 네트워크가, 전남은 목포·신안·무안 지역을 대상으로 서남방송이 각각 방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불교 광주 FM 방송(BBS)은 1995년 3월 1일 개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포교를 위주로 한 전문 라디오 방송이 등장하였다. 1993년 5월 정부는 종교방송 지역국 허가방침을 발표하고 1994년 4월 9일 부산과 함께 광주에 불교광주 FM 방송을 허가하였다. 광주, 전남북 일원을 가시청권으로 하루 21시간씩 방송을 개시하였다.

광주 평화방송(PBC)은 1996년 6월 2일 호출부호 HLDL, FM 99.9MHz로 개국했으며, 광주 교통방송(TBN)은 1996년 12월 6일 정보통신부에서 방송국 허가(가허가)를 받았으며, 1997년 12월 20일 [도로교통안전협회 교통방송광주본부]를 개국, 현재까지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장성의 유선방송국은 장성읍·황룡면 일원에 서비스하는 장성유선방송사(대표 김애순)와 삼계면 일원에 서비스하는 삼계유선방송사(대표 김애순), 서삼면·북일면·북이면·북하면 일원에 서비스하는 백양유선방송사(대표 김지영) 등이 있다. (고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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